기고문/특집

[산경일보] 영암군, 역사와 문화 찾아 떠나는 시간여행

산경일보 2019. 3. 3. 14:54




구림한옥체험관

영암지방 주거문화의 변천과정


동구림과 서구림을 잇는 구림사거리에 우리나라의 주거문화 변천사를 단장해 놓았다. 동굴집과 움집에서 삼국시대의 토담집, 조선시대의 초가집에 이르기까지 영암지방의 주거문화 변천과정을 쉽게 알아 볼 수 있다.


초가집은 토담 또는 죽담 등을 이용해서 벽체를 만들거나 기둥과 기둥사이에 외를 넣고 짚을 썰어 흙을 메우고 흙을 곱게 발라 벽체를 만든 뒤 지붕위에 흙과 볏짚을 이용해서 여름의 더위와 겨울의 추위를 막고자 한 것이다. 


특히 이 집은 영암군 덕진면에 소재하는 최성호씨 가옥(중요민속자료 제164호)의 안채를 재현한 것으로 전형적인 우진각 초가이다. 그 정확한 건립연대는 알 수 없으나 최씨 가족은 현재 13대찌 이곳에 살고 있다. 평면형태는 맨 좌측으로 부터 부엌과 안방, 그리고 대청, 건넌방이 나란히 있는 남부형 일자형 평면이며 전면과 우측면에는 툇마루가 놓여 있다.


기와집은 중,상류 주택에 많으며, 팔작지붕은 주로 기와집의 안채에 많이 쓰여졌고 양쪽 합각 부분의 지붕미가 육중하고 단아한 맛이 있다. 이 집은 약 270년 전에 영암군 군서면에 건축된 주영현 가옥의 안채를 재현한 남부지방의 전형적인 일자형 평면茸活막 팔작지붕의 기와집이다.


평면구성은 좌측으로부터 부어과 안방 그리고 정면 2칸 규모의 대청과 건넌방이 나란히 있으며 안방과 대청의 전면에는 툇마루가, 그리고 건넌방의 우측 문앞에는 쪽마루가 놓여져 있다. 대청의 뒷편 1칸은 마루를 놓지 않고 반 지하실로 만들어 독을 놓았으며 또한 기둥사이로 중방을 두어 그 상부에 선반을 꾸며 놓은것이 특이하다.



영암왕인박사유적지

왕인이 새롭게 조명


구림마을의 동쪽 문필봉 기슭에 자리잡은 왕인유적지는 왕인이 새롭게 조명되면서 그의 자취를 복원해 놓은 곳이다. 

왕인은 일본 응신천황의 초청을 받아 ‘논어’ 10권과 ‘천자문’ 1권을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학문을 인정받은 그는 일본 태자의 스승이 됐고 함께 일본으로 간 기술자들을 통해 여러 가지 기술을 전했다.


왕인박사유적지는 일본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유적지에서 왕인석상에 이르는 등산로는 서해안 최고의 노을을 감상할 수 있다. 

유적지 정문인 백제문을 들어서면 좌측에 일본에서 헌정한 왕인정화비가 있고 맞은편에 전시관이 있다. 문 하나를 더 들어가면 안쪽에 왕인 사당이 있다. 


이 유적지는 주한 일본대사 등 사회 저명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1987년에 준공식을 가졌다.



장천리선사주거지

선사시대 사람들의 생활모습 한 눈에!


청동기시대의 집자리 유적으로, 서호면 면소재지에서 동남쪽으로 약 500m 떨어진 장천리 괴음마을 앞 도로변에 자리하고 있다.

청동기 시대 이곳 사람들은 지름이 4∼5m 크기의 원형 움집을 짓고 살았다. 움집은 땅을 30∼50m정도 파고 내부바닥은 진흙으로 다졌으며 벽을 따라 기둥을 세우고 풀이나 갈대로 지붕을 만들었다. 


집의 면적은 약 12∼20㎡로 4명에서 5명 정도의 가족이 모여 생활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형태는 원형 내지 타원형을 이루고 있다. 중앙에 얕은 구덩이가 있고, 바닥면 가장자리에 기둥구멍이 마련돼서 있는데, 화로터나 출입구가 없는 것이 특색이다. 출토된 유물로는 항아리형·사발형의 무늬없는토기, 화살촉·가락바퀴·삼각형 돌칼 등 석기류가 있다.


현재 이곳에는 원형 움집 1채와 사각형의 움집 1채를 복원해 놓았다. 원형은 원래 이곳에 있던 형태의 것이고 사각형은 중부나 북부지방에서 발견되는 움집을 비교할 수 있게 만들어 놓았다. 유적지 옆에는 발굴유물을 전시하는 전시관이 있는데 집안의 생활모습, 돌칼, 돌화살촉 복제품이 전시돼서 있으며 고인돌이나 토기 만드는 방법이 그림으로 소개돼서 있어. 선사시대 사람들의 생활모습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1984년 목포대학 박물관에서 발굴조사한 것으로, 한반도 서남부지역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문화권의 유적이다.



영암군 인물 소개:김완장군

학성군으로 책봉됨과 동시에 
금궤철권 및 영정 하사받아


김완 장군은 1577년 (宣祖 10년) 8월 23일 영암군 서호면 몽해리 899번지에서 학천군(鶴川君) 휘(諱) 극조와 모부인(母夫人) 천안전씨(天安全氏) 사이에서 장자로 태어났다.


전 부인이 맹호(猛虎)가 품속으로 들어오고, 영암만 바닷물이 그의 치마폭으로 몰려드는 상서러운 꿈을 꾸고 임신했으며, 출생했을 때에는 흰 기운이 방안에 가득했다가 하루가 지난 후에야 흩어지니 사람들이 이상하게 여겼다고들 한다.


장군은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자라면서 기골이 장대하고 여력이 다른 사람과 달리 출중해서 크나큰 솥도 쉽게 드는 힘이 있었다. 또한 재주와 지략이 뛰어나고 활쏘기와 말타기도 뛰어 났다고 한다.


1615년 관관무제시예(冠觀武才試藝)에 장원 급제 후 고산진 첨사, 전라우수군 병마절도사를 걸쳐 평안도 방어사로 있던 중 이괄의 난을 당해 이를 평정한 공으로 진무공신 가의대부 학성군(鶴城君)으로 책봉됨과 동시에 금궤철권 및 영정을 하사받았다.


또한 1634년 훈련원 도정, 황해도 병사 겸 황주 목사등의 벼슬을 역임하고, 고향에 돌아와 이듬해 장군 나이 59세이던 1635년 2월 2일 영암군 서호면 화송리에서 서거했다. 


사후 자헌대부 병조판서로 추대 됐으며, 영조 24년(1748)에 양무공(襄武公) 이란 시호(諡號)와 함께 부조묘의 명을 받았다.

김완 장군 영정은 보물제 1305호(2000.12. 22)로 지정돼서 있으며, 영암군 서호면 화송리에는 구고사 및 김완 장군 부조묘(도 지정 기념물 제 49호) 등이 있다.